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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walls

돌담, 시간을 품다.

by slobbie 2015. 4. 7.

[ 작가노트 ]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청산도에는 돌담이 많다. 돌담은 삶의 배경처럼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의식되지 않았다. 돌담은 내가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었고 호박이 열리는 풍요이며 연을 날릴 때 바람막이였다. 돌담은 그렇게 의식되지 않는 방식으로 체화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돌담을 의식적으로 의식한 계기, 즉 거리를 두고 돌담을 사진의 대상으로 의식한 계기는 돌담의 사라짐이다. 돌담은 만들어지고 풍화되면서 오랜 시간을 견디지만 가장 쉽고 빠르게 사라진다. 비와 바람에 노출된 돌담은 쉽게 허물어지지만 쌓기는 어렵다. 시멘트 블록담장에 비해 많은 노동력과 준비과정 그리고 기술이 요구된다. 가뜩이나 돌담은 가난의 상징으로 여겨져 빨리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애처롭지만 돌담만큼 고향의 풍광을 과격하게 바꾸는 것이 있을까?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었던 돌담은 사라질 때 의식되었다. 소중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던 것은 사라짐으로서 가치를 증명한다.

 

  돌담의 사라짐을 남겨야 한다는 충동을 낳았다. 나는 돌담을 사진에 담으면서 이유를 물었다.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어 사라짐으로써 의식되는 돌담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그 가치를 곡선과 중첩, 느림과 풍화, 무위적 인위로 개념화하고 이를 표현할 방식을 모색했다.

 

  첫째, 돌담의 곡선과 그것의 중첩을 담았다. 돌담은 지형을 따라 곡선으로 형성된다. 효율성을 극대화한 블록담장과 벽돌담장은 직선을 선호한다. 직선을 긋는데 방해가 되는 지형은 잘려나가거나 돋우어진다. 그러나 돌담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다. 집의 경계와 논밭의 경계 그리고 길의 경계를 긋는 돌담의 곡선은 중첩되어 어우러진다. 돌담들의 감춤과 드러남이 곡선의 선율을 긋는 장면을 담으려 노력했다. 선들의 엇갈림과 만남, 시작과 끝이 우리 삶의 그것을 직관하게 한다.

 

  둘째, 돌담의 풍화 흔적을 통해 느림을 담았다. 이제 막 만들어진 돌담은 풍화된 돌담과 잘 조화하지 않는다. 이끼도 없고, 흙색도 다르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바람, 식물, 곤충, 동물 그리고 사람들의 곁을 지키다보면 돌담은 어김없이 주변과 어우러진다. 인간문명의 산물인 함석지붕과 콘크리트, 전봇대, 플라스틱 물통도 풍화를 겪다보면 돌담과 같은 분위기로 덧씌워진다.

 

  셋째, 돌담은 작위적 산물이지만 무위의 산물로 변해간다. 돌담이 풍화 속에서 자연스러워지듯, 사람들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연스러워진다. 자연 속에서 인위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무위의 삶,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생겨난 주름들을 간직한 사람들에 주목했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으로 중첩된 시간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준 돌담과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감사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영정 사진을 찍어드렸다. 영정 사진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모두들 좋아하신다. 촬영에 응해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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