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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평면에 담긴 어무니의 영원한 시간 

최행준 (미학박사)

  소박하게 차려진 연극 무대에 서 있는 배우가 아닐까? 김성민의 사진 작품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이다. 사진들이 연극 무대처럼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배경의 평면성 때문인 것 같다. 사진의 배경은 대부분 드넓은 공간이 아니라 평면이다. 사진의 프레임 밖으로 잘린 부분을 상상해 보면 뒷집, 나무, , 하늘 순으로 깊어지는 공간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깊이의 공간을 자르고 평면적 배경으로 막아버렸다. 흙벽, 돌담, , 창호문이 배경을 막고, 삶을 일구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소품처럼 배치된다. 바구니, 절구, 망태기, 대나무발, 빗자루, 갈퀴 …….  

  그림이나 사진은 평면예술이기 때문에 풍부한 공간을 표현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평면의 면적이 깊이의 공간으로 무한대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관람자는 평면의 답답함을 극복하고 무한대의 공간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약 400년을 지켜오던 미덕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작가가 마네(E. Manet 1832~1883)였다. 미술사가들은 마네가 그림을 다시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평가했다. 공간을 거부한 현대회화가 마네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진들이 연극 무대처럼 보이는 두 번째 이유는 인물의 정면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정면으로 서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소일거리에 집중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한 채 다소 경직되게 서 있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선 자세, 지팡이를 짚고 정면을 본 자세, 안방의 가족사진들 앞에서 앉아 있는 자세, 마을 사람 모두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 자세 …….   

  정면성은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현세를 강조하는 문명에서는 자연스러움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내세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문명에서는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정면성을 미덕으로 여겼다. 인물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을 모아 인물을 그린 것이다. 이집트 회화는 얼굴을 측면, 가슴과 어깨를 정면, 손과 발을 측면으로 인물을 구성한다. 경직되어 있지만 변하지 않는 인물의 본질을 포착하여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김성민이 연극 무대에 서 있는 배우 같은 사진, 즉 답답해 보이는 평면성과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정면성을 강조한 사진을 찍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관객의 시선을 확 트인 공간으로 도피할 수 없게 닫힌 배경으로 막고 삶의 소품이 배경과 어우러지는 질서에 주목하게 한다. 배경과 소품의 질서는 인물에게서 반복되는데, 수직과 수평의 나무기둥은 인물의 팔과 다리에서 반복되고, 갈퀴의 선들은 인물의 눈가 주름에서 반복된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비닐하우스는 백발의 가르마에서 반복되고, 성긴 창살은 비뚤어진 인물의 옷매무새에서 반복된다.  

  막힌 배경과 경직된 자세들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인물과 소품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촬영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만남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김성민은 그 사람과의 짧은 만남을 한 장의 사진 속에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성민은 사진의 숙명인 평면을 인정한 채 인물이 겪은 오랜 시간을 담는다. 순간을 부정한 긴 시간은 있을 수 없으니 찰나의 순간, 평면에 담긴 어무니의 긴 시간을 가늠해 보자.  

 

<김성민 작가노트>

기억 속, ‘어무니의 시간

고향을 떠나와 힘들고 지친 타지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평화로웠던 시골 토담집은 늘 그리움이며 향수였다. 하지만 그런 기억 속에서 시골 토담집의 추억 속 그리움이 아닌 지금 우리의 고향에는 어떤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도시에서의 각박한 일상을 벗어나 안식할 수 있는 고향의 시간은 아직도 느리고 평온하게 흐르지만, 무너져가는 돌담 속에는 노모(老母)의 쓸쓸함과 세월이 짙게 묻어있다. 고향에 가면 호화스럽지도 않고 풍족하지도 않고 달리 오색찬란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이 맞아주시고 항상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께서 그곳에 계신다.

버리기가 아까워 하나하나 모아놓은 세간살이들.

머지않아 자식들이 다 버리고 태워 버리리라는 것을 알지만, 청춘과 인생이 담겨있어 차마 당신 곁에서 멀리 못하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나이만큼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아 구식 고물이 된다. 고향마을에는 이제 숨소리가 점점 흐려져 가고 간간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짐승들의 희미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온다. 고향 집, 농토를 처분하면 그나마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당신의 품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식들에게 당신 것을 먹이시려고 아직도 힘겹게 농사일을 하신다. 농촌을 떠나 번잡한 도시에 살고자 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제는 버려진 빈집들과 외로이 사시는 노인과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은 옛날 세간살이들이 쓸쓸히 우리의 고향을 지켜주고 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신선하고 청량한 바람에서 '공기 읽기'는 나의 시각적 표현의 연습 시간이다. 공간 안에서 여백과 단순함은 삶의 단순화라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빛으로 삶을 만지고, 빗는 작업이 고전적이겠지만 내 사진 작업의 일관된 개념이며 내가 짊어져야 할 사진적 사명이다. 사진 작업을 통해 삶의 공간을 시각적 수단으로 해체하고 조립해 모든 사람과 함께 감동할 수 있는 삶의 새로운 정의를 해석하고 싶다.